1989년 11월 4일, 요코하마시横浜市의 자택에서 변호사 사카모토 츠츠미(坂本堤, 당시 33세), 아내 사토코(都子, 당시 29세), 그리고 생후 1년여에 불과했던 아들 다츠히코(龍彦)가 옴진리교 간부들에 의해 살해됐다. 당시에는 세 사람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사회는 오랫동안 이 사건을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 실종 사건’으로 알고 있었다. 진실이 밝혀진 것은 무려 6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 사건을 다시 돌아보는 이유는 단순히 옴진리교라는 특수한 종교 집단의 범죄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카모토 사건에는 사이비 종교의 폭력성뿐만 아니라 ‘피해자와 가족의 호소를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경찰은 위험 신호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언론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지식인은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어디까지 관용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복합적으로 담겨 있다. 이 질문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카모토 츠츠미는 어떤 변호사였는가
사카모토 츠츠미는 1987년 4월 요코하마 법률사무소(横浜法律事務所)에 들어갔다. 학생 시절부터 장애인을 지원하는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훗날 아내가 된 사토코를 만났다. 변호사가 된 뒤에는 노동 사건뿐 아니라 소년사건과 의료과실 사건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요코하마 변호사회’가 어린이 인권 상담창구를 개설할 때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그를 단순히 ‘옴진리교를 비판하던 변호사’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직업적 사명으로 생각했던 젊은 인권변호사였다.
그런 그가 옴진리교 문제와 만나게 된 것은 1989년 봄이었다. 딸이 옴진리교에 빠진 뒤 집을 떠났다는 한 어머니가 그를 찾아와 상담했다. 이후 사카모토는 옴진리교에 빠진 신도 가족들의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자녀와의 면회 및 귀가 문제 등을 놓고 교단 측과 협상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단순한 가족 간 종교 갈등으로 보기 어려운 여러 문제를 발견했다.
미성년 신도가 학교 교육으로부터 분리되는 문제, ‘보시(布施)’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거액의 헌금, 신도와 가족의 단절, 교주의 특별한 능력을 선전하며 판매하는 각종 ‘이니시에이션’(교단의 입문·수행 의식) 등이었다. 사카모토는 자녀를 무조건 집으로 데려오고 싶어 하는 부모들에게도 “아이에게도 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설명했고 동시에 다양한 가치관을 접하며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 가야 할 중요한 성장기에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교주의 가르침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주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옴진리교 간부들에 의해 살해된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坂本堤, 당시 33세), 아내 사토코(都子, 당시 29세), 그리고 생후 1년여에 불과했던 아들 다츠히코(龍彦) (출처:「요미우리신문」) |
그의 출발점은 ‘종교를 없애야 한다’는 반종교적 사고가 아니었다.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그 자유가 다른 사람의 인간적 존엄과 권리를 침해하는 순간에는 법과 사회가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비슷한 피해를 호소하는 부모들이 늘어나면서 ‘옴진리교 피해자 모임(オウム真理教被害者の会)’이 만들어졌고, 사카모토 역시 동료 변호사들에게 협력을 요청해 피해대책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공안조사청(公安調査庁)의 옴진리교 관련 기록에 따르면 사카모토는 1989년 5월경부터 출가 신도의 부모들을 대리해 교단과 교섭했으며, 미성년자의 행방과 헌금제도의 문제 등을 지적하면서 피해대책 변호인단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즉 그는 옴진리교 입장에서 단순한 ‘비판자’가 아니었다. 피해자들을 조직하고 법률적 대응을 준비하며 행정기관에도 정보를 제공하려 했던 실질적인 법적 상대였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자유는 없다”
1989년 가을, 옴진리교를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더욱 높아졌다. 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サンデ〡毎日)」가 옴진리교를 비판하는 기획기사를 시작했고, 사카모토 역시 언론 취재에 응하면서 교단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지적하기 시작했다. 1989년 10월 31일, 옴진리교 간부 조오유 후미히로(上祐史浩), 하야카와 키요히데早(川紀代秀), 교단 측 변호사 아오야마 요시노부(青山吉伸) 등이 요코하마 법률사무소를 찾아왔다. 사카모토에게 법적 대응을 중단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교단 측이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자 사카모토는 다음과 같은 취지로 반박했다고 전해진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자유는 없다.” 이 한마디는 사카모토 사건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종교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가 보장해야 할 기본적 권리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가 경제적 착취, 신체적 폭력, 성적 착취, 아동의 권리 침해, 가족과의 강제적 단절까지 정당화하는 권리가 될 수는 없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옴진리교의 교주 마츠모토 치즈오(松本智津夫), 즉 아사하라 쇼오코(麻原彰晃)는 사카모토의 활동을 교단의 발전을 가로막는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공안조사청 자료에 따르면 아사하라는 1989년 10월 말 열린 간부회의에서 사카모토가 피해자 모임을 조직했으며 경찰에 정보를 제공해 교단에 대한 수사를 촉발할 가능성까지 있다고 간부들에게 설명했다.
사카모토가 위험한 존재로 간주된 이유는 단순히 교리를 비판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피해자 가족들을 연결하고 있었고 변호인단을 만들고 있었으며 교단의 활동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법적·사회적 문제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폐쇄적인 조직에 가장 위협적인 사람은 큰 목소리로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다.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연결하고, 그것을 증거와 법률의 언어로 바꾸어 사회에 전달하는 사람이다. 사카모토 변호사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TBS 비디오 문제
사카모토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TBS(東京放送) 비디오 문제다. 1989년 10월 26일 TBS의 와이드쇼 프로그램 ‘3시에 만납시다(3時にあいましょう)’는 옴진리교 문제와 관련해 사카모토를 인터뷰했다. 그런데 방송 전에 옴진리교 간부들이 TBS를 찾아와 항의했고, TBS 측은 아직 방송되지 않은 사카모토의 인터뷰 영상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으며 결국 인터뷰는 방송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사카모토 일가는 살해됐다.
여기서 사실관계는 신중하게 구분해야 한다. TBS가 영상을 보여준 행위가 곧바로 살인을 발생시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언론사가 취재 대상자의 미방송 인터뷰를 그가 비판하고 있던 당사자에게 보여준 것은 취재원보호와 언론윤리의 관점에서 중대한 문제였다. 1996년 일본 국회에서도 이 문제가 다뤄졌다.
사카모토 사건 관계자들은 TBS가 교단 간부들의 항의 방문과 영상 공개사실을 사건 발생 후에도 변호사 측이나 수사기관에 알리지 않았다는 점을 강하게 문제 삼았다. 만약 그 사실이 조기에 전달됐다면 수사의 흐름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가능성’에 대한 평가이지, TBS가 살인을 초래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한국 언론 역시 사이비 문제를 다룰 때 피해자의 신원, 상담 내용, 탈퇴 계획, 가족관계와 같은 정보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사이비 문제에서 취재원 보호는 단순한 언론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때로는 사람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89년 11월 4일1989년 11월 초 아사하라는 교단 간부들에게 사카모토를 살해하도록 지시했다. 처음에는 사카모토 한 명을 대상으로 한 범행이 계획됐다. 그러나 11월 3일 밤 범행조가 사카모토의 집을 확인한 결과 가족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교단 측은 아사하라에게 연락했고, 결국 가족까지 함께 살해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11월 4일 새벽, 교단 간부 6명이 요코하마시 이소고구(磯子区)의 사카모토 자택에 침입했다. 범인들은 처음부터 준비했던 약물을 이용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세 사람을 질식시켜 살해했다. 이후 범인들은 세 사람의 시신을 자동차에 실어 이동했고 서로 다른 세 지역의 산에 각각 유기했다. 사카모토의 시신은 니가타현(新潟県), 사토코의 시신은 토야마현(富山県), 다츠히코의 시신은 나가노현(長野県)에 묻혔다. 가족을 살해한 뒤 시신마저 서로 다른 곳에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범인들은 범행 현장에 옴진리교의 배지인 ‘푸르샤(プルシャ)’를 남겼다. 이 때문에 사건 직후부터 옴진리교의 관련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됐다. 사카모토가 소속되어 있던 요코하마 법률사무소와 유족들은 교단의 관여 가능성을 강하게 의심했지만, 시신이 없었고 결정적인 물증도 부족했다. 옴진리교 측은 관련성을 전면 부인했다. 오히려 현장에서 발견된 배지가 자신들을 범인으로 몰기 위해 누군가 고의로 놓은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까지 펼쳤다.
이후 일본의 변호사들은 ‘사카모토 변호사와 가족을 구하는 전국 변호사모임坂本弁護士と家族を救う全国弁護士の会’을 조직해 전국적으로 전단지를 배포하고 세 사람을 찾는 활동을 진행했다. 당시 그들은 세 사람이 이미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살아 있기를 바라며 거의 6년 동안 가족을 찾았던 것이다.
당시 가나가와현 경찰(神奈川県警)의 초기 수사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강한 비판이 남아 있다. 사건 현장에는 혈흔이 있었고 옴진리교의 배지도 발견됐다. 주변 변호사들도 교단 관련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그럼에도 경찰이 사건 초기부터 충분히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사카모토가 노동 사건 등을 담당하며 경찰과 대립하는 사건에 관여했던 점 때문에 수사기관이 그와 요코하마 법률사무소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나왔다.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 관계자가 “납치라고 계속 주장하다가는 망신당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사카모토가 자발적으로 사라졌을 가능성이나 다른 정치적·사회적 갈등에 연루됐을 가능성 등이 거론되면서 수사가 분산됐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한쪽 주장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당시 요코하마 지방검찰청 검사장이었던 사토 미치오(佐藤道夫)는 훗날 이러한 비판에 대해 경찰이 실제로는 옴진리교의 관련 가능성을 상당히 의심하고 있었지만, 당시 확보된 증거만으로는 강제수사나 압수수색을 실시하기 어려웠다는 취지로 반론했다.
▲나가노현 오오마치시(長野県大町市)에 설치된 사카모토 일가 추모비. 전면에는 사카모토 가족을 형상화한 부조가 있다. Wikimedia Commons, “Omachi Dam park Sakamoto Tatsuhiko cenotaph”. |
따라서 “경찰이 옴진리교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결과적으로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옴진리교는 그 뒤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따라서 사카모토 사건 당시, 보다 적극적인 수사가 이루어졌다면 이후의 범죄를 막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아니냐는 비판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러나 “경찰의 초기 수사 실패가 직접적으로 마츠모토 사린 사건이나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초래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인과관계의 단순화일 수도 있다.
▲옴진리교의 배지. 사카모토 변호사가 수집한 교단 관련 자료 등은 요코하마 법률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다. |
6년 뒤 밝혀진 진실
1995년 3월 20일 아침, 누군가 도쿄의 지하철(현 도쿄 메트로)의 마루노우치선, 히비야선, 치요다선의 전차 안에 사린가스를 살포해 승객과 역무원 등 12명이 사망, 5510명이 중경상을 입는 전대미문의 테러가 발생했다. 경찰에 의한 대대적인 옴진리교 강제 수사를 눈치챈 교단이 수사의 교란을 목적으로 일으킨 것이다. 통근 러시아워의 시간대에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 일본 경찰은 옴진리교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사카모토 사건의 실체도 마침내 밝혀지기 시작했다. 실행범 가운데 한 명인 오카자키 가즈아키岡﨑一明가 1995년 4월 범행을 자백하면서 사카모토 일가가 이미 1989년에 살해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해 9월 경찰은 산속을 수색했고 9월 6일 사카모토와 사토코의 시신이, 나흘 뒤인 9월 10일에는 다츠히코의 시신이 발견됐다. 1989년 11월부터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가족과 동료들에게 가장 잔혹한 형태로 진실이 돌아온 것이다.
▲독가스 테러 현장에서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는 소방대원들(도쿄 소방청) |
이 사건은 단순한 ‘종교 살인’이 아니었다
2025년은 사카모토 일가의 시신이 발견된 지 30년이 되는 해였다. 가나가와현 변호사회(神奈川県弁護士会)는 당시 발표한 회장 담화에서 이 사건을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 사카모토가 옴진리교 피해자 구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을 위협으로 느낀 교단이 저지른 ‘변호사 업무에 대한 최악의 방해행위’라고 평가했다.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사카모토가 살해된 것은 개인적으로 옴진리교를 싫어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변호사로서 피해자를 돕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사건은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범죄인 동시에 피해자가 법적 도움을 받을 권리를 폭력으로 차단하려 한 범죄였다. 그 때문에 일본 변호사 사회에서 사카모토 사건은 지금도 ‘변호사 업무방해 대책의 원점’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사카모토 사건이 낯설지만은 않은 이유가 있다. 1994년 한국에서도 종교 연구가이자 이단·사이비 문제를 추적해 온 탁명환 소장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 사건의 구체적인 배경과 범행 구조는 서로 다르므로 동일한 사건처럼 비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공통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폐쇄적인 종교 조직이나 그 주변의 이해관계를 비판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사람의 안전을 사회는 어떻게 지킬 것인가?”
사카모토는 피해자 가족의 상담을 받아 법률적으로 대응했다. 탁명환 소장은 한국에서 여러 종교 집단을 조사하고 비판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활동과 관련된 폭력에 의해 생명을 잃었다. 최근 ‘사이비 헌터’를 통해 탁명환 살해 사건이 다시 사회적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사이비 문제를 단순히 “어떤 교리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라는 신학적 논쟁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조직 안에서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이 지켜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통일교·신천지·JMS 등의 문제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한국 사회는 이미 통일교, 신천지, JMS 등 여러 종교 단체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논란을 경험해 왔다. 그러나 이들을 모두 옴진리교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옴진리교는 실제로 조직적 살인과 화학무기를 이용한 무차별 테러까지 실행한 집단이다. 다른 종교 단체를 비판한다고 해서 사실관계가 서로 다른 조직을 같은 범주에 놓고 ‘제2의 옴진리교’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비교해야 할 것은 개별 교리가 아니라 ‘구조’이다. ‘지도자에게 비판할 수 없는 절대적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가’, ‘조직을 떠나려는 사람에게 위협이나 불이익이 가해지는가’, ‘가족과 외부 사회로부터 신도를 고립시키는가’, ‘과도한 헌금이나 노동을 요구하는가’, ‘성적·신체적·심리적 폭력이 존재하는가’,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사람을 배신자나 악으로 규정하는가’, ‘언론·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해 피해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는가’ 등의 질문이 중요하다.
그와 함께 인권의 언어로 이러한 문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이비 문제를 논하면 반드시 나오는 반론이 있다. “종교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맞는 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는 특정 종교가 옳은지 틀린지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다수 종교가 소수 종교를 억압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자유가 존재한다. 종교를 떠날 자유와, 가족과 만날 자유와 재산을 지킬 자유, 그리고 교육받을 자유와 자신의 몸과 성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이다. 또한 리더를 비판할 자유와 함께 피해를 입었을 때 경찰, 변호사, 언론과 상담할 자유도 있다. 따라서 사이비 대책의 핵심은 ‘이상한 종교를 국가가 단속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신앙의 내용이 아니라 행위를 보아야 한다. 사기, 폭력, 협박, 감금, 성폭력, 아동학대, 과도한 경제적 착취 등 구체적인 인권침해가 있다면 종교라는 이유로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 중심으로 보면서 혐오를 조심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사이비종교 문제에 있어 상당히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경험과 정보가 충분히 공유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피해자와 가족이 종교 문제에 정통한 변호사, 상담기관, 종교인에게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둘째, 탈퇴를 원하는 사람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특히 조직을 비판하거나 내부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 대한 협박과 스토킹 등 위험 징후가 있을 경우 일반적인 종교 갈등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셋째, 경찰과 행정기관이 ‘종교 문제에는 개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범죄의 징후까지 외면해서는 안 된다.
넷째, 언론은 사이비 문제를 단순한 오락이나 자극적인 콘텐츠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취재원과 피해자의 신원을 보호하고, 민감한 정보가 범죄 가능성이 있는 조직에 전달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섯째, 종교계 스스로의 역할도 중요하다. 기성 종교가 사이비 문제를 단순히 “우리와 교리가 다르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접근하면 일반 사회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종교계 역시 인권, 투명성, 성적 자기결정권, 아동 보호, 재정의 투명성이라는 보편적 기준을 받아들여야 한다.
동시에 경계해야 할 것도 있다. ‘사이비 척결’이라는 구호가 특정 종교나 신도 전체에 대한 혐오로 변하는 것이다. 한 단체의 지도부가 잘못했다고 해서 그곳에 속한 모든 신도를 가해자로 볼 수는 없다. 많은 신도는 오히려 피해자일 수 있다.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고, 인간관계를 잃은 뒤에도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을 조롱하거나 “왜 그런 곳에 빠졌느냐”고 비난하면 피해자를 오히려 조직 내부로 더 깊이 밀어 넣을 수 있다. 사카모토 변호사가 보여준 태도는 여기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는 부모의 마음만을 대변해 아이를 강제로 데려오자고 하지 않았다. 아이에게도 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이가 다양한 생각을 접하고 스스로 판단할 기회까지 박탈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사람을 존중하면서 조직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다.
▲추도식에서 고인을 위해 기도하는 참가자(출처:「니가타일보」) |
또 다른 사카모토를 만들지 않기 위해
지난 9월 12일 사카모토 변호사의 시신이 발견된 니가타현의 현장 인근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시신이 발견된 지 31년이 지난 가운데, 일본변호사연합회 마츠다 준이치(松田純一)회장을 비롯한 약 30명이 참석해 사건이 잊히지 않도록 하고, 옴진리교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피해자 구제에 힘썼던 사카모토 변호사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결의를 새롭게 다졌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자유는 없다.” 사카모토 변호사가 옴진리교와의 마지막 교섭 과정에서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은 여전히 무거운 울림을 준다. 사이비종교 문제를 막는 출발점은 어느 종교가 ‘진짜’이고 어느 종교가 ‘가짜’인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다. 한 사람의 자유와 존엄이 침해되고 있다는 작은 신호를 이 사회가 놓치지 않는 데 있다. 사카모토 일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교훈도 바로 그것일 것이다.
- Copyrights ⓒ 월간 「현대종교」 허락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