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정식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한일장신대학교 신약학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어린 시절 들은 처녀 귀신, 총각 귀신 이야기는 아련한 추억의 뒤안길에서 흥미롭던 유년기의 흔적을 상기시켜준다. 처녀, 총각처럼 혼인도 하지 못한 채 죽은 영혼이 생동하는 인간들에게 나타나 해코지를 하거나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한다고 하니 두려움과 호기심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동심이 어디 있었으랴. 나이 들면서 이러한 옛날이야기는 황당한 전설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옛날은 현재 속에도 끈질기게 존재하는가 보다.
증명할 수 없는 이러한 귀신 이야기는 기독교의 일부 교단에서 부활하여 귀신은 죽은 조상의 영혼이 나타난 것이라거나 불신자의 영혼이 죽어 귀신이 되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이 여전히 일각에서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하며 흥분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조상들의 죽은 원혼이 귀신이 되어 후세의 자손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업보론의 변형된 잡설로 연약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가계저주론’ 따위를 유포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 이런 것들은 다들 한통속의 신화적 세계관에 똬리를 틀고 있는 미신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것들이 속설로 부유하거나 우스갯거리로 겉돌기보다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게, 비록 소수에게 국한된 현상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이고 모두가 깊이 성찰하여 극복해야 할 우리 신앙생활의 현주소다.
죽은 자의 혼령이 지상의 인간세계에 출몰하여 모종의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가 드물기는 해도 성경에 나오기는 한다.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통해 죽은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내는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다(삼상28:3~28). 사무엘이 죽은 뒤 사울왕은 기브온에 진을 치고 수넴의 블레셋 군대와 대적하던 중 꿈, 우림, 예언자의 신탁 등을 동원했지만 아무런 비답이 없게 되자 신하들의 권유에 따라 그 무당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내 멸망의 신탁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사무엘의 사후 존재는 사울왕의 조상이 아니고 불신자의 죽은 영혼과도 상관이 없다. 그저 사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을 재차 확인해주기 위해 어쩌다 죽은 사무엘의 혼령이 출현했을 뿐이다. 이는 복음서의 변화산 이야기에 죽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와 함께 잠시 머문 이야기를 통해서도 유사하게 확인되는 문학적 토포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 복음서에 많이 나오는 귀신 이야기는 이러한 사후 혼령의 출현과 전혀 상관없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여기서 ‘귀신’은 대개 ‘더러운 영들’과 유사한 개념으로 인간의 생명을 병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악한 세력의 상징체로 표현된다. 이에 해당되는 희랍어 ‘daimonion’은 ‘마귀’로도 번역될 수 있다. 또 히브리적 종교사의 맥락 속에 귀신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하여 타락한 천사로서 사탄, 바알세불, 벨리알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악한 영의 실체와 연동되어 그 수하에 심부름하는 졸개처럼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신약시대 이후 정형화된 하나의 마귀론적 계보로 재구성된 결과이지 그 개념의 본래적 취지와는 사뭇 다르다. daimonion은 희랍어 daimon과 동일한 개념으로 고대 그리스의 종교 및 신화에서 다양한 의미를 띠고 있다. 대강의 공통분모를 취해보면 이는 다소 수준 낮은 신들과 죽은 영웅들의 영혼을 포함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인간의 운명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종종 ‘운명’이란 신과도 동일시되며 종종 특정 개인에게 분신과 같이 따라붙어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영향이나 개입의 결과에 따라 그들은 ‘좋은 다이몬’(eudaimon) 또는 ‘나쁜 다이몬’(kakodaimon)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플라톤은 그의 대표작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에로스를 설명하면서 이와 연계시켜 ‘다이몬’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 바 있다. “그것은[=중간자] 위대한 정령이라 할 수 있지요. 사실 정령(daimon)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신과 가사적 존재의 중간자라 할 수 있답니다.” 요컨대 다이몬은 신이 아니고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자로서 “신들에게는 인간들이 전하는 기도와 번제물들을, 그리고 인간들에게는 신들이 전하는 그들의 뜻과 번제에 대한 답례의 선물들을 해석해주고 전달해줌으로써, 신과 인간의 중간에 존재하면서 그 빈틈을 채워주고 이 우주 전체를 그 자체에 결합 시켜주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본 것이다. 애당초 악령이나 귀신 등의 부정적인 함의와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성서의 천사 개념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종교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성서의 특정 용어나 구절을 자의적인 잣대로 해석하거나 묵상하는 것은 그 당사자에게 허황된 망상을 불러일으키기 일쑤다. 또 그것을 교리적인 강령으로 만들어 연약한 신자들에게 강조할 경우 혹세무민하는 이단사설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공자처럼 정직하게 이승의 사실만으로도 모르는 게 많아 너무 벅찬데 어찌 사후의 일을 알 수 있겠느냐고 고백하는 게 더 현명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물론 궁금한 게 많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의문이 특히 심하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주장하여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불멸하는 실체로 하늘나라에 들어가 신의 품에 안긴다는 믿음이 통상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플라톤의 인간론에 기초한 도식으로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내세관이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성서적인 내세관으로 죽은 자의 몸이 잠자는 것처럼 있다가 마지막 때에 부활하여 영세무궁토록 우리 주와 함께 거하리라는 종말론적 믿음도 여전히 막강한 편이다. 바울의 고백대로 가장 품이 넓은 내세관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맺어진 구원의 언약이 썩지 않는 소망으로 영원하리라는 것일 게다.
이처럼 자신의 한 생명이 가는 길을 살아생전에도 한 치 앞길을 예상할 수 없고 수많은 묘연한 비밀과 모호한 이치가 수두룩한 법이다. 하물며 죽은 조상들의 행방이나 남들이 죽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 ‘귀신’으로의 변신을 운운하고 그로 인한 영적 감염의 결과 가계로 전수되는 ‘저주’의 살을 떠벌이며 협박하듯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게 아니라면 기만적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주력한 것은 이러한 영계의 신비에 대한 흥미진진한 몽상이나 만담이 아니었다. 그가 귀신이란 말을 사용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귀신의 영적 권세에 대한 연막을 피워 사람들의 호기심을 동하게 하고 그 영향력으로 자신의 영적 권위를 강화시키려는 의도와는 추호의 연관이 없었다. 그의 일편단심 관심사는 귀신이든, 더러운 영이든, 아니면 종교적 정치적 억압의 사슬에 눌려 비롯된 것이든, 망가지고 병든 생명들의 불쌍한 사정에 적극 개입하여 그들을 고치고 회복시켜 건강하게 살도록 애써 도와줌으로써 하나님의 생명 창조에 담긴 본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는 그 병의 내력을 죽은 조상에게 소급시키거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혼령에 가져다 붙이는 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인과응보적 환원론은 오히려 예수에게 극복 대상이었다. 실제로 당시 유대인 대중들 가운데도 널리 퍼져 있던 항간의 믿음인즉, 사람이 병들거나 불행하게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그의 부모의 죄업 또는 그 사람이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예수는 이러한 항간의 믿음을 있는 그대로 추인하고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한 생명의 시력을 고쳐 회복시켜주면서 그가 그렇게 된 것이 그의 죄 때문도, 그의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인식하였다(요9:3). 아무리 따져 봐도 모호할 뿐인 불행한 인생의 기구한 사연에 대해 그는 기원론적으로 따지기보다 선교적 차원에서 접근해 문제의 구체적인 해결이라는 실천의 권능으로 응답했다. 우리도 밑도 끝도 없는 귀신 타령은 그만 접고 제발 예수처럼 그렇게 해보자.